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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릉 가기 약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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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릉(洪裕陵:26대 고종의 홍릉과 27대 순종의 유릉)
1.홍유릉(洪裕陵) 안내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홍릉과 순종황제와 순명황후, 계후 순정황후의 유릉을 합칭하여 홍유릉이라고 한다.
이 능은 우리나라 역사상 마지막으로 조영된 왕릉인 것이다.
망우리 고개를 넘어 경춘가도를 달리다보면 남양주시(市)를 벗어나기 전에 홍유릉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다.
표지판에 씌어 있는 대로 화살표를 따라 오른쪽으로 차를 돌리면 금방 능 입구가 보인다.
고종과 명성왕후가 잠들어 있는 홍릉은 지금까지 돌아보던 여느 왕릉들과 그 모습이나 형식이 많이 다르다. 1897년에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 왕을 "황제"라 일컬었던 만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따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홍유릉은 왕릉이 아니라 황제의 능인 셈이다.
2.제26대 고종(高宗)과 황후(皇后) 명성황후(明成皇后) - 홍릉(洪陵)
홍살문 안으로 마주보이는 건물은 침전, 고종황제 신위를 봉안한 제전이다.
다른 능에서 보던 것들과는 달리 정자 모양의 정자각 대신 정면 5간, 측면 4간의 일자형 건물인 침전을 세웠다.
침전보다 더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홍살문에서 침전까지 참도(參道)의 좌우에 나란히 선 석물들이다.
침전에서 가까운 것부터의 석물을 보면, 침전 앞에 문.무석을 세우고
이어 홍살문까지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의 순으로 석수(石獸)를 세웠다.
코끼리는 분명하게 알아보겠고 낙타도 등에 달린 혹으로 그럭저럭 구분되나 사자와 해태는 비슷하다.
문무석도 다른 능들과는 좀 다르게 생겼다.
문인석은 금관을 쓰고 있으며, 키가 385cm나 돼 왕릉 중에는 가장 크고, 문무석과 석수들은
모두 침전 앞으로 나가 봉분 주위는 침전의 웅장함에 비해 단촐해 보인다.
현종 이후 보이지 않던 병풍석이 화려하게 등장해 봉분을 감싸고 있으며,
그 주위에 화문으로 장식한 난간석이 둘려져 있고 봉분 앞에는 고석으로 괸 상석과
양쪽 옆에 망주석 , 앞쪽에 사각의 장명등만 서 있다.
명성황후의 능은 처음에 청량리 홍릉에 장사하였다가 고종 승하 때, 이곳으로 모셔와
1919년 3월 4일 서향언덕에 합장하여 장사지냈다.
이 능소는 고종 재세시(在世時)의 풍수사 제갈(諸葛), 주운한(朱雲漢), 김광석(金光石),
전기응(全基應)에게 명하여 선정한 곳이다.
그 규모와 기획은 중국 고식(古式)을 따른 것이다.
이 천마산하에 결혈된 능소의 내룡을 살펴보면, 광주산맥의 대성산대룡(大成山大龍)이
포천 광덕산(廣德山)을 거쳐 백운산하(白雲山下)에서 분형제(分兄弟)하여 국망봉(國望峰).도성고개.운악산(雲岳山).주금산(鑄錦山)을 거쳐 천마산(天摩山)이 되어 내진(來盡)하였으니
광주산맥의 한 대지(大枝)가 머물은 것이다.
대성산을 태조(太祖)로한 이 충천준립룡(沖天峻立龍)은 장차 행룡을 마치고,
여장(旅裝)을 풀고 머물고자 할제, 탁립운소(卓立雲소)한 천마산이 웅진(雄鎭)하였으니
이는 파군대성(破軍大成:破軍今)이다.
이 대룡은 그 사이에 수단(數段)의 누전(樓殿)을 형성하였으며, 이 천마산에서 좌우로 크게 개장(開帳)하고
중심낙맥, 재개이중연후(再開二重然後) 대단과협(大斷過峽)하고 홀연 탁립백봉(卓立白峰)하였다.
이 백봉에서 서쪽방향으로 행룡하여 중중개장 사오중후(四五重後) 재락(再落)하여 결혈(結穴)하였으니
이곳이 즉 능소인 고종황제의 무덤이며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다.
대성산 태조가 되고, 천마산 중조, 백봉이 소조산이 되었구나.
천마산을 중조으로 삼고 백봉을 주산(主山)으로 하며, 거기에서 흘러내린 맥이
동쪽인 묘(卯)에서 입수(入首)하여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을 이루는 그 상부에 을좌신향(乙坐辛向)으로
봉분을 구축하였다.
청룡 백호는 내외로 첩첩환포하고 조산이 겹겹이며, 내외 팔자수(八字水)가 여러 갈래로 흘러
포장(包藏)이 극한 지형이다.
홍릉 터는 본래 장중응(張重應)씨의 선산(先山)이었으나 능터로 선정된 곳이다.
왕릉을 조영할 때 공사중 천광(穿壙)하던 광중(壙中)에서, "오백년 권조지지(五百年權措之地)"라고 새겨진 석각(石刻)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이조초기 왕사로 있던 무학대사가 5백년 후에 제왕의 능터가 될 것을 예언한 것이라 전하니,
즉 이 석각은 5백년이나 되는 옛날 이름난 명사(明師)인 무학이 왕터의 땅으로 보장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당시인들은 틀림없이 호적지(好適地)라 여겼을 것이다.
3.홍릉( 洪陵)의 특징
조선의 제26대 국왕(國王)이자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초대 황제(皇帝)이기도 했던
고종(1852-1919, 재위 44년)과 황후(皇后)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 1851-1895)의 홍릉(洪陵)은
같은 능역(陵域)에 있는 고종의 아들 순종(純宗)과 황후(皇后), 계후(繼后)를 모신 유릉(裕陵)과 함께 새로운 양식의 능 제도로 이루어져 있다.
능역 조성은 처음 명성황후가 1895년에 시해(弑害)된 뒤 우여곡절을 겪고 동구릉 내에
숙릉(肅陵)으로 조성했다가, 대한제국 수립과 함께 서울 청량리로 옮겨 홍릉(洪陵)으로 조성한다.
그 후 1919년에 고종이 승하(昇遐)하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천장(遷葬)해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을 이루게 된 것이다.
홍릉의 능제는 유릉(裕陵)과 함께 이전의 조선 왕릉 제도와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皇帝)로 승하했기 때문에 명(明)나라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떠
황제릉(皇帝陵)으로 조성된 것이다.
즉, 종래의 능원 앞의 정자각(丁字閣)을 대신해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寢殿)을 세웠고
봉분(封墳) 주위에 있던 석인(石人)과 석수(石獸)들이 아래로 내려와 침전 앞에 놓이게 되었다.
거대한 크기의 석인(石人)이 좌우로 도열해 있는데, 문인석(文人石)이 금관(金冠)을 쓰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고, 대체로 조선왕릉 석인(石人)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들었다.
그 아래 양쪽의 석수(石獸)들 역시 종래의 석인(石人) 뒤에 석마(石馬)만 세웠던 것과 달리
좌우의 문무인석과 같은 열로 홍살문(紅--門)까지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의 순서로 세워놓았다.
봉분(封墳)에는 화려한 병풍석(屛風石)을 감싸 연화(蓮花)와 모란무늬를 조각했고
난간석(欄干石)으로 둘레를 보호하고 있다.
상석(床石) 앞의 장명등(長明燈)은 사각(四角) 형식은 동일하나, 대석(臺石)이 기존 방식과 다른
변화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홍릉(洪陵)의 새로운 능제는 조선(朝鮮)이 망한 이후에 조성되어
종래의 왕릉 제도가 발전된 모습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를 것이다.
홍유릉(洪裕陵) : 조선 제 26대 고종과 명성황후의 합장릉 홍릉과, 순종(純宗)과 순명황후와 순정황후의 합장릉.
고종의 능 : 홍릉(洪陵) (사적 제207호, 경기도 구리시 금곡동)
▶ 홍릉은 구리시에 위치한 홍유릉내에 있다. 고종은 1910년 한일합방 후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1919년 1월 21일에 덕수궁에서 붕어하였는데, 이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나돌아 국장일인 3월 1일에 3·1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 고종의 능을 이곳에 모시면서 천장론이 일던 명성황후 민씨의 능을 이곳으로 옮겨 1919년 3월 4일 서향 언덕에 합장하였다.
▶ 홍릉은 합장릉이며, 역대 조선의 왕릉과는 그 모습이나 형식이 많이 다른데, 그것은 고종이 1897년에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면서 왕을 황제(皇帝)로 격상시켰기 때문에 능을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고종과 순종의 능은 왕릉이 아니라 황제의 능인 것이 된다.
▶ 능의 구조를 살펴보면 기존의 능과 다르다는 것이 확인되는데, 고종의 신위를 보관한 제전(침전)도 기종의 정(丁)자의 형태가 아니라 정면 5간 측면 1간의 일자형 건물이다. 홍살문에서 제전(침전)까지 가는 길에 서있는 석물들도 기존의 문·무인석외에도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와 두 마리의 말 등 기존의 왕릉에 없었던 것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문·무인석도 그 형태가 기존의 것들과 달라서 모두 성장을 강조하여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특히 문인석은 건릉이나 수릉처럼 금관을 쓰고 있으며 키가 385㎝나 되어 기존의 왕릉에 서있는 문인석들보다 크다. 봉분의 주위는 병풍석이 감싸고 있으며, 그 주위를 화문이 조각된 난간석이 둘러싸고 있다. 봉분의 앞에는 고석으로 된 상석이 있고 양 옆에는 망주석이 앞쪽에는 사각의 장명등이 서 있다.
순종의 능 : 유릉(裕陵) (사적 제206호, 경기도 구리시 금곡동)
▶ 유릉은 사적 207호로 경기도 구리시 금곡동 산 141-1번지에 위치한 홍유릉 안에 위치하고 있다. 순종황제는 1874년(고종 11) 2월 8일에 태어나 1875년 2월 18일에 왕세자로 다시 1897년 (광무 1)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7년 7월 19에 일제의 강요로 황위를 물러난 고종의 뒤를 이어 대리청정을 하다가 8월 27일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 1919년 (융희 4) 8월 22일에 열린 어전회의에서 한일합병조약이 통과되고 8월 29일에 순정황후의 숙부 윤덕영이 황제 대신 옥새를 찍어 조선 왕조가 멸망하게 되면서 순종도 창덕궁 이왕으로 강등되었다. 1926년 4월 25일에 53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6월 11일에 홍릉 왼쪽 산줄기에 있는 유릉에 안장되었다.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에 6·10 만세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기도 하였다.
▶ 순명황후는 순종이 즉위 이전인 1904년(광무 8)에 승하했으며, 오늘날의 성동구 뚝섬인 양주의 용마산 기슭에 있는 유릉에 모셔졌다가 순종이 승하하자 유릉으로 천장되었다.
▶ 순종황제의 계후인 순정왕후는 1906년(광무 10)에 동궁의 계비가 되었고 다음해에 순종이 황태자가 되면서 황태자비에 책봉되었다가 순종이 즉위하면서 황후가 되었다. 순정황후는 만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1966년 1월 121일에 창덕궁의 낙선재(관련유적참조)에서 72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유릉에 합장되었다.
▶ 유릉은 합장릉으로 순종과 순명황후·순정황후가 모두 하나의 능에 모셔졌으며 홍릉과 비슷한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제전(침전)에서 홍살문 방향으로 문·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와 두 마리의 말이 늘어서 있으며, 문·무인석은 홍릉보다 사실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곳의 문·무인석은 지금까지의 것들과는 조각수법부터 큰 차이를 보여 매우 사실적이고 개성적이어서 마치 현대의 조각수법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문인석은 홍릉의 것과 같이 금관을 쓰고 있다. 제전(침전) 역시 홍릉의 것과 같이 일자형이며, 건물 안쪽에는 단청이 칠해져있고 천장에 두 마리의 용이 그려진 용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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